"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소중함" 북한 장애인 인권 활동가
맹효심 학우(국문21)과의 인터뷰!
슈니 여러분 안녕하세요, 슈리포터입니다 :)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유롭고 다양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어쩌면 익숙할 지도 모르겠어요.
이번에 저희 슈리포터가 만난 학우가 그 다양한 삶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알려주었는데요!
바로 8년 전 탈북을 결심하고 한국에 정착한 북한 장애인 인권 활동가 맹효심 학우입니다!
맹효심 학우의 이야기, 함께 들으러 가보실까요?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A. 안녕하세요~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인 맹효심이라고 합니다. 저는 2018년도에 탈북을 했고, 북한에서는 중국과 가까운 혜산시에 살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북한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반갑습니다!
Q.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A. 저희는 엄마가 제봉사 일도 하고 아빠가 직장도 다니셔서 중산층 정도에 위치한 상태였어요. 집에 오토바이도 있었고 편의점도 운영했죠. 그 편의점에 오신 분들이 많으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손님 한 분이 물건을 가져가서 돈을 안 내는 거예요. 이게 솔직하게 음료 한 잔 값이면 상관없는데, 점점 거액이 되니까 상황이 안 좋아졌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분이 저희 부모님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게다가 저희 아빠 엄마가 돈을 달라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찾아와서 쇠막대기로 부모님에게 휘둘렀어요. 그래서 엄마는 팔이 부러지시고 아빠는 머리를 다쳐서 수술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뇌물을 받아서 엄마가 스스로 넘어진 걸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법원에 항의를 했는데, 법원은 법과 경찰 편이더라고요. 국민들을 도와주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마음 속에 쌓여있던 모든 게 터져버리면서 여기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모든 일들이 김 부자를 찬양하는 목적이거든요. 그래서 탈북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Q.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와 탈북하는 과정에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탈북 과정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자료 출처 채널 A <이제 만나러 갑니다>
A. 여기 보시면, 저희 집이 혜산시에 위치해 있어서 중국 바로 아래에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기 되게 쉬웠습니다.
물론 국경을 넘으려면 연선지대에 CCTV도 있고 철조망도 엄청 많아서 쉽진 않아요.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베트남에서 라오스로 가고, 라오스에서 또 태국으로 가고, 태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여정이었어요. 이동 수단으로는 다양하게 많이 탔는데 대부분 걷는 게 많았습니다. 또 기차, 오토바이에 벤, 자전거, 배 등 모든 이동수단을 다 탔던 것 같아요.
Q. 탈북 후 가장 변화된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해요.
A. 북한은 자유가 하나도 없어요. 여행이나 문화 생활은 둘째치고 귀걸이나 머리 기르기도 못하고 K-드라마나 콘텐츠를 보면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정부에 나쁜 말도 할 수 없고 무조건 김 부자를 찬양해야 돼요.
한국에 정착한 뒤 여행 경험을 쌓은 모습
그래서 탈북 후에 가장 크게 느꼈던 변화는 인권과 자유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에 오고 나서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자유가 보장되니까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게 가장 크더라고요.
내가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두 번째로 표현의 자유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인권이 보장되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북한은 인터넷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한국 오고 나서 인터넷이 되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정부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인지 몰랐어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모두가 찬양하니까요. 그런데 한국 와서 6.25전쟁이 남침이었다는 것 등을 처음 알게 되면서, 역사 왜곡이 정말 많았다는 것과 정부가 악랄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Q. 탈북 후 한국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적응 초기 학우님의 삶과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프랑스 샤머니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한 맹효심 학우
A. 처음에 왔을 때는 진짜 갓 태어난 아기였어요. 뭐든지 보고 배우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 어느정도 매체를 많이 접했으니까 처음에는 북한 사투리를 거의 안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쓰는 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북한은 6.25 전쟁 때 사용하던 언어가 그대로 고착화 됐어요. 한국은 외래어를 많이 받아들여서 언어가 조금 변했는데 북한은 아직 순우리말이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노인 분들 같은 경우에는 제 말을 잘 이해하시더라고요.
또 솔직히 어린 친구들이 좋아하는 발라드 같은 노래를 처음에는 따라하기 힘들었어요. 랩이나 힙합도 이해가 안됐고 오히려 트로트가 너무 좋더라고요. ㅎㅎ 익숙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Q. 서울여대에 입학하게 된 계기, 전공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까요?
A. 한국에 오고 나서 영어와 관련된 프로그램들을 많이 경험했어요.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에 서울여대 불어불문학과 서정연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교수님이 프랑스어를 가르치시고 책을 이용해서 토론하는 수업을 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서울여대 교수님인지 몰랐는데, 교수님과 같이 책도 읽고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서울여대 교수라고 알려주시는 거예요. 어느날 교수님이 학교에 한 번 같이 가자고 하셔서 엉겁결에 왔는데 캠퍼스가 너무 예뻤어요. 나무도 많으니까 공기가 정말 좋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다녀보고 싶은 로망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부터 수시 준비를 하게 되었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도 보면서 이렇게 합격하게 되었어요. (자기소개서 진짜 힘들더라고요....)
그 후에 교수님께 붙었다고 하니까 너무 잘했다고 다행이라고 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서정연 교수님 덕분에 또 서울여대를 알게 돼서 이렇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종종 밥도 사주시고, 정말 감사한 분이에요.
Q. 학교를 다니시면서 어떤 생활을 하셨나요? 학교 생활은 어떠신지 궁금해요.
50주년기념관 앞 연못
A. 처음 입학했을 때, 제가 21학번이다보니까 코로나가 한창이었어요. 그래서 시간이 좀 지나고 본격적으로 캠퍼스를 많이 돌아다닌 것 같습니다.
너무 힘들 때 혹은 스트레스 받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50주년기념관 옆에 작은 연못이 있거든요! 그 연못에 물고기가 많아요.
거기 가서 앉아있으면 너무 힐링되더라고요. 너무 웃긴 게 사람이 앉으면 물고기가 막 다가와요. 근데 제가 줄 먹이가 없으니까 막 멀리 떨어져 앉으면 또 가더라고요. 얘들도 아는구나 하고 신기했어요. 학우 분들도 한 번 연못 구경했으면 좋겠어요. :)
Q. 서울여대에서 수강한 강의 혹은 활동 중 추천하고 싶거나 인강깊었던 것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A. <세계명작읽기> 라는 교양 수업이 있어요. 처음에는 책도 읽어야 하고 내용이 어려워서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주제가 삶, 죽음, 사랑 같은 것들이고, 평소에 저희가 잘 생각하지 않는 주제라서 정말 흥미로웠어요. 책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사랑은 무엇인가'와 같은 깊은 생각들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이 수업을 통해 카프카의 '변신'을 읽게 되었는데, 주인공이 벌레로 변하는 것해서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처음엔 이런 걸 왜 읽어!' 했는데 배우고 나니까 진짜 의미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수업이 너무 감사했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전공에 대해서 말하자면, 평소에 한국어로 대화하고 항상 사용하니까 쉽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국어에 대해서 더 깊게 다뤄서 어렵더라고요. 특히, 중세 시대 국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웠는데 점점 배우다 보니까 나름 재미있게 공부 중입니다 :)
Q. 북한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2019년도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2022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 국무부로부터 북한 장애인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북한 장애인들의 삶에 대해 발표했어요. 북한 정부는 매년 장애인을 지원한 사례와 변화된 모습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이와 완전히 다른 내용을 들어서 그분들이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 후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 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보낸 16년이 저에게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관심을 끊고 싶었던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다시 다가온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도 많았습니다. 북한 정부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본명을 사용해 활동하다 보니,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목소리를 낸다면 북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으로 용기를 냈습니다.
활동 초기에도 이 일을 할수록 마음이 아파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어머니께서 '북한에 아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데, 네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용기를 주셨어요. 이후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응원을 들으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Q. 북한에서 장애인 인권이 어떤지 자세히 알려주세요.
A. 국가에서 장애인에게 지원해주는 것이 전혀 없어요. 한국에는 장애인 정책을 통해 수당을 지급하거나 기업에서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의무화해 일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죠. 하지만, 북한에도 장애자 보호법이 있는데도 실질적으로 지원이 없어 많이 사람들이 그 법이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결국 장애인들이 생계를 위해 스스로 일을 찾아 나서야 해요.
북한은 공산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었고, '배급제'도 실패했어요. 그래서 직장에 나가 일을 하더라도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일을 하지 않으면 '노동단련대'라고 불리는 곳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해야 하거든요. 이런 상황 속에서, 토지가 있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토지가 없는 사람들은 부모님처럼 편의점을 운영하거나 옷을 만들어 판매하는 등 자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장애인들은 선천적, 후천적으로 부류를 나눌 수 있고 후천적 장애인 중에서 군대에서 일을 하다 다친 분들은 명예 군인이라고 부르기에 그들에게는 쌀을 조금 제공하는데, 양이 부족해서 기차에서 장사를 하기도 해요. 북한은 전기가 없기 때문에 가다가 멈추거든요. 그럼 그 사이에 탑승해서 음식 같은 것을 판매하면서 먹고 사는 거에요.
이렇게 아무것도 주는 게 없는데 북한 정부에서는 명예군인이나 장애자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신문인 '로동신문'에 기사를 내요. 제일 황당했던게 점자블록이 평양에서 중심구 말고는 설치가 안되어 있는데 설치되어 있다고 기사를 냈어요. 그리고 유엔 인권에 가서 '우리는 장애인 인권에 엄청 노력하고 있다'고 말해요. 그럼 외국인들은 이렇게 되어 있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죠.
Q. 북한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궁금해요
FSI 단체에서 맹효심 학우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한 모습
A. 저는 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FSI 라는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어요.
FSI는 북한 인권을 위한 비영리 단체로 Freedom Speaker International 외국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처음 활동을 할 때는 외국에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많은 기회를 주셔서 저에게 정말 감사한 단체입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영어로 북한 인권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대부분 북한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 오기 때문에 한국에서 여행을 하면 DMZ를 가요. DMZ를 갔다온 후 북한 인권 및 북한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이루어진 영어 스피치 대회
관광객 분들이 올 때 한번에 10명, 12명, 20 분씩 오거든요. 그러면 그 분들이 뿌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를 전달하고, 북한 인권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https://www.youtube.com/watch?v=AXtZOQrjMk4
Q. 지난 5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제네바 정상회의> 행사에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
해당 행사에서 발언한 내용에 대해 소개 부탁드려요.
(출처) 좌 : 스위스 제네바 회의 공식 홈페이지 / 우; UN WATCH 플리커
A.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제네바 정상회의>는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와서 자기 나라에 대한 인권을 이야기하는 곳이에요. 저는 '북한 장애인의 삶' 을 중심으로 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북한에서 장애자(인) 보호법이 있는데 실질적으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으며, 그분들도 진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기 때문에 장애인의 대부분 사람들이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한다' 와 같은 내용을 전달했어요.
행사와 관련된 발언은 아니지만 스위스를 갔을 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규모가 큰 회의에서 영어로 하는 것에 꽤 스트레스를 받아서, 기분 전환을 위해 뭔가 모험적이고 활동적인 것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스위스 바로 옆에 있는 프랑스 샤모니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했답니다. 이때 스트레스를 풀고 기분전환이 되면서 다음 날에 연설을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한국어 교사가 되어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어 교사 외에도 북한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서 최종 목표나 계획이 있다면 궁금해요.
인도에서 맹효심 학우의 모습
A. 북한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서 최종 목표는 없지만, 한 가지 바람은 북한에 살고 계시는 분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제가 이런 목소리를 냄으로써 북한 장애인 인권을 알리는 데에 조금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은 바위에 계란치기라고 하더라도 작은 영향이 조금씩 늘면 언제가는 그분들의 삶을 개선될 수 있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합니다.
Q. 서울여대 학우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려요!
A. 인생은 한 번뿐이니 마음껏 즐기라고 하고 싶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자유를 갖고 있으면 그 소중함을 잘 알 수가 없어요.
저는 자유를 가지고 난 후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한국에서는 몇 살까지는 대학을 졸업해야 되고, 취업해야 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대가 정해져 있잖아요. 이런 것에 너무 압박받지 말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원하는 목표만 있으면 방향이 달라도 원하는 꼭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이 한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자기 생일을 맞이해서 혼자 여행을 오셨더라고요. 저는 혼자 여행 온 것을 보고 매우 놀랐어요. 그래서 저는 여행을 하는 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여행을 가면 보는게 다양해져서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습니다.
맹효심 학우와의 인터뷰는 여기까지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cVm1-y1uyM&t=4s
맹효심 학우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했던 연설도 해당 링크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
대학원에서 하게 될 공부와 그 후 한국어 교사라는 꿈까지 멋지게 이룰 수 있도록 저희 슈리포터가 응원하겠습니다 ♥
자유롭고 다양한 삶을 마음껏 살아보라는 학우님의 말처럼,
이 글을 보는 모든 슈니 여러분도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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